해전 17-명량해전-전라우수영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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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영 성지 전라우수영성지는 기념물 제139호이며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 이다.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전라우수영은 세종22 (1440) 해남 황원곶(현 위치)에 이를 이설, 전라우수영은 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이후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2,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한편 본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로 총괄했다가 그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김억추가 잠사 후임 우수사로 보임된다. 명량 해전 이후 김억추의 육상 전근으로 명량 해전에서 활약했던 안위가 이순신의 천거로 전라우수사로 임명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7관 12포이다. 속읍은 나주목(羅州), 영광군(靈光), 함평현(咸平), 무안현(務安), 영암군(靈巖), 해남현(海南), 진도군(珍島) 이고, 해남현 읍성 서쪽 67리에 우도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이 있었다. 현대의 해남군 문내면 일대이다. 속진으로는, 임치진(臨淄鎭) - 함평현의 서쪽 77리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금모포(黔毛浦)ㆍ법성포(法聖浦)ㆍ다경포(多慶浦)ㆍ목포(木浦)ㆍ어란포(於蘭浦)ㆍ군산포(群山浦)ㆍ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를 관할) 금모포영(黔毛浦營) - 부안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 법성포영(法聖浦營) - 영광군 북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다경포영(多慶浦營) - 영광군의 남쪽 1백 50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 수군만호. 목포영(木浦營) - 무안현에서 남쪽으로 68리 떨어져 있다. ○ 수군만호. 어란포영(於蘭浦營) - 해남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 군산포영(群山浦營) - 옥구현의 북쪽 22리에 있다. ○ 수군만호. 남도포영(南桃浦營) - 진도군의 서쪽 47리에 있다. ○ 수군만호. 금갑도영(金甲島營) - 진도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가리포진(加里浦鎭) - 강진현 완도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 마도영(馬度營) - 강진현의 남쪽 64리에 있다. ○ 수군만호. 회령포영(會寧浦營) - 장흥도호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 대동지지에 따르면 7관 18포이다. 속읍은 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진도(珍島)ㆍ영광(靈光)ㆍ해남(海南)ㆍ무안(務安)ㆍ함평(咸平)이고, 속진 법성포(法聖浦)ㆍ군산(群山)ㆍ고군산(古群山)ㆍ위도(島)ㆍ임류도(臨溜島)ㆍ고금도(古今島)ㆍ가리포(加里浦)ㆍ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ㆍ어란포(於蘭浦)ㆍ이진(梨津)ㆍ신지도(薪智島)ㆍ마도(馬島)ㆍ목포(木浦)ㆍ다경포(多慶浦)ㆍ지도(智島)ㆍ임자도(荏子島)ㆍ검모포(黔毛浦)이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비로는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등 26개소의 각종 당청과 중요시설로 선청과 집회소 또는 회의장소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중요시설로 선창을 두었는데, 성남문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소의 항구 시설이었다. 참고문헌 명량대첩 기념공원, 해남군 / 해남의 문화유산(2008), 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1996. 해남의 문화유적 길라잡이(김승기), 해남군청, 1995. 해남의 문화유산 해남군, 땅끝해남(정윤섭), 울돌목, 문내면 향우회자료, 1999 , 전라우수영 해남문화원
전라우수영성 전라우수영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함선으로 일본함선 133척을 막아내었다고 하는 울독목과 너무 가까이 있는 전라우수영. 전라우수영의 경우 남해서 서해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여 위치적으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수군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전라우수영이 이곳 해남 문내면에 설치한 첫번째 이유일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우수영의 경우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무안 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된 후, 1440년 세종 22년에 해남 황원관으로 옮겼다가 1465년 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여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4대문과 함께 객사, 동헌, 창고, 옥사 등의 건물이 보이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조선 후기의 전라우수영에는 관사로서 26개의 각종 당청이 있었고, 중요 시설로 선청과 집회소·회의장소로 사용된 12개의 누정이 있었다. 또 전라우수영성 남문 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의 항구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 귀선 2척, 해골선·방골선이 각 1척, 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하였으며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노·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습니다. 전라우수영을 가기 위해서는 병목과 같은 좁은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곳이 바로 원문입니다. 원문(轅門)을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군영(軍營)이나 영문(營門)을 이르던 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저번에도 이 원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통영과 같이 원문이라는 공통적인 방어적 성격의 장성과 같은 성곽이 전라우수영 앞을 막고 있습니다. 통영에 통제영이 생긴 것과 같이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육지에서 오는 적의 경우 여기 원문에서만 방어하면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합니다. 적은 인력으로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이곳 원문이 전라우수영이라는 영성이 들어설 수 있었던 두번째 일 것으로 보입니다. ▼ 광여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입니다. 일단 전라우수영성을 보면 원문이 확실히 보이고 전라우수영성이 보이는데 성문이 5개가 있습니다. 위 1872년 지방지보다 성문이 많은 것일까요? 아니면 암문을 표시한 것일까요? 또 원문의 경우 원문성(城)으로 보일정도로 장성과 같이 축성한 것이 보입니다. 현재 원문이 있었던 곳의 경우 원문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 여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인데 위 광여도와 비슷합니다.
▼ 지승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성곽에 여장을 그려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습니다. 다만 원문이 있는 원문성의 경우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 해동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입니다. 원문의 경우 상당히 좁은 지역에 설치하여 방어적 성격으로 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원문을 만들고 원문성을 만들어 놓으니 전라우수영성의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원문의 경우 전라우수영이 있는 길목에 있는데 현재의 지도를 보면 상당히 폭이 넓어서 방어상 유리한 지형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형을 확대를 해보면 좌우측 모두 바다를 매립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 현재의 지도에 매립한 토지를 바다로 만드니 폭이 아주 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정도라면 충분히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폭의 경우 가장 넓은 곳이 400여미터인데 이 폭보다 더 좁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우수영성의 경우도 통영과 마찬가지의 원문이라면 이런 식의 장성과 같은 방법의 체성이 전라우수영성을 보호 했을 것이고 이곳을 굳게 지키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사진은 합성으로 이런 식으로 되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 이미지는 합성임을 알려드립니다. 실제 이렇게 생겼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1910년 경의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체성의 높이는 4미터 정도 되어 보이지 않아 보이며 바닷물이 전라우수영성까지 들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에 전라우수영성의 체성을 표시한 것으로 4대문과 함께 표시된 길의 경우 예전 조선시대때 부터 사용한 길입니다. 전라우수영의 경우 북서측의 산을 낀 평산성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남문 앞에 선소도 같이 운영하는 구조입니다.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지 방식은 경상좌수영, 통제영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평산성의 구조와 북측에 장대를 세워 해상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비슷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 전라우수영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석성과 토성이 함께 어우려져 축성된 진성이라는 것이 특이한 경우입니다.
전라우수영이 들어선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 셋째 좁은 해협에 형성된 울돌목입니다. 울돌목에 관해서는 잘 아실 것이라 패스합니다. 네번째가 전라우수영 앞에 있는 양도섬인데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기능을 하였는 것과 같고 멀리서 보았을때 전선을 보여주지 않는 점도 장점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지도에 나오는 빨간색화살표는 수군들의 진출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전라우수영의 경우 전라좌수영, 통제영과 같이 2군데로 진출 할 수 있는 구조인데 이는 조선시대 당시 수군이 있었던 수군진의 보편적인 것입니다. 또 육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녹색으로 된 화살표로 따라가야하는데 이곳은 원문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 전라우수영의 경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수군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전라우수영성의 경우 현재 거의 무너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 남쪽 성벽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서외리·선두리에 성축이 약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남아있는 것은 우물인데 이 우물이 당시 전라우수영성의 규모를 확인해 주고 있으며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해남군청)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전라좌수영과 통제영에 있는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이 상당히 웅장한 객사형식의 건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적어도 전라우수영인데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그렇네요. 고지도 기준으로 봐서는 분명히 객사가 있었고 객사터로 남아있으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이 큰 규모의 객사인가? 에서는 필자는 그 정도의 규모는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거제에 있는 기성관의 경우 수군진이 아니지만 상당한 규모의 객사형식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은 규모의 객사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전라우수영성의 복원이 한다고 하는데 관련된 기사나 뉴스는 보기가 힘이 드네요. (자료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다음지도, 다음 우수영카페(http://cafe.daum.net/usuyeongcafe) 전라우수영 성지(全羅右水營 城址)를 찾아서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20년 전, 임진년에 일어난 그 치욕스런 왜구의 난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일부 학자들은 거창하게 조일(朝日)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조선의 땅을 기습 침략하여 노략과 약탈과 살인과 강간과 방화를 일삼고 조선인들을 납치하고 문화를 파괴한 것은 변란이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그런 의미이다. 1597년 9월 16일,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수몰시켜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꾼 명량해전에 빛나는 전라우수영의 본거지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성지를 2012년 임진년에 찾았다. 일반인에게 전라우수영 성지는 명량대첩으로 알려진 울돌목을 연상하지만 실제는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선두리, 동외리 일대를 가리킨다. 전방에 보이는 야산이 전라우수영 성지의 성곽 흔적이 남아있는 망해산(望海山)으로 산 정상에는 최근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세워졌다.
조선 수군병력이 성곽을 쌓고 왜구의 침략을 감시하고 막아낸 곳은 문내면 우수영 서상리와 동외리에 걸쳐있는 나지막한 야산인 망해산(望海山)이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부터 망해산을 망제산(望帝山 또는 望祭山), 망태산(望泰山)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이 의미하는 역사의 흔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은 산 정상에 망해루라는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놓고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나, 수십년 전에는 정상에 봉화대를 쌓았던 돌들과 성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봉화는 해남 화원 일성산 봉화대와 무안을 거쳐 한양까지 연결된 것으로 추측된다.
망해루 올라가는 길은 해남군에서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 안내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동네 길을 시멘트로 엉성하게 포장하는 바람에 군사유적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시골의 낙후된 모습이 그대로 전해온다. 시멘트길 옆에는 공사 후에 퍼 올린 흙 사이로 조선말엽 자기굽들의 파편이 즐비하다. 수백년 동안 조선의 수군들이 상주하던 곳이라 필자는 이곳이 거대한 유적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낙후할 때로 낙후해 버린 우수영 성지는 역사를 증인해 줄 어르신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서 지금은 역사의 뿌리조차 찾기 힘든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당시 우수영 성지의 동서남북에는 성문을 만들어서 군영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군영의 북쪽인 북문 일부 흔적만 아련하게 남아있고, 성의 둘레가 2484척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성지의 북쪽과 서쪽을 지켰던 북문(좌)과 서문(우) 방향
우수영 성지의 남쪽으로 향하는 서상리에 위치한 방죽샘은 성지에서 유일하게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유물이다.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어렵게 확인해본 결과 16세기 말 육각형 석조물 구조와 비슷하다 한다. 그 전에는 병영에서 노역하는 병사들의 목을 축이는 작은 샘이었으리라. 우수영은 본디 물이 귀한 곳이었다. 해서 곳곳에 저수지를 파서 물을 저장하였는데 유독 이곳 방죽샘 주위는 가뭄에도 그 물이 크게 마르지 않아서 근동 주민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방죽샘은 성지의 남문 쪽인 문내면 서상리 354~355번지 일대에 걸쳐있으며, 샘을 조성하였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판석의 마모된 부분을 교체하였던 흔적과 비각이 남아있다. 풍수지리상 이곳 방죽샘이 호랑이의 눈을 상징한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글 자료 : 해남군청 성지의 동쪽으로 이동하면 보물 503호로 지정되어있는 명량대첩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숙종 14년에 건립한 이 비는 높이가 2.67미터, 폭 1.14미터로 장엄하게 만들어졌다. 1942년 조선총독부는 이순신 장군의 항일보국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철거하여 서울 경복궁 근정전 뒷마당에 이 비를 묻어버렸다. 해방 후 우수영의 유지들이 다시 명량대첩비를 가지고 와서 학동리 충무사라는 사당에 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가 2011년 우수영 성지의 동문 쪽으로 추정되는 곳인 동외리 955-6번지에 이 비를 다시 세웠다.
우수영 성지의 동문 쪽으로 추정되는 곳인 동외리 955-6번지에 세운 명량대첩비 성지의 안쪽에 존재했을 동헌과 군기고, 영창, 객사 등은 오래전에 사라져 그 흔적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전라우수영 성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소멸되는 것이다. 필자가 지역의 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명량해전 당시 ‘다마시’라는 왜놈 장수의 목을 베고 투구갑옷을 성의 영창(營倉)에 보관하였다가 이후 수백년동안 팔월 한가위날이 오면 지역의 장수들이 투구를 들어 올리며 왜적을 물리친 일을 기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식민지 시절 왜놈들은 이를 회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들이 하나씩 둘씩 발굴되고 정리되어 우리 역사상 가장 서글프면서도 위대한 항일승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과 우수영 성지를 후손에 길이 알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2012 임진년에 우리는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악을 쓰는 간악한 왜구들의 망령을 보고 있다. 나라가 짓밟혔을 때 분연히 떨고 일어나 적들을 섬멸했던 이곳 전라우수영 성지에서 조선 수군들의 거룩한 혼령이 깨어나서 간악한 왜놈들의 망령을 몰아내고 이 나라와 민족을 보호해 주시길 빌며, 애국애족의 마음 가득 안고 발걸음을 돌렸다. [출처] 해전 17-명량해전-전라우수영 성지|작성자 byunsdd8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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