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키카하라 전투

한편 동군이 9월 14일에 진을 구축하자, 서군은 오가키 성을 빠져나와 서쪽의 세키가하라로 이동하였다. 이는 동군을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87]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반월 형태의 진을 치고 동쪽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해오는 동군을 일방적으로 포위해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에야스는 서군쪽의 지휘체계가 이에야스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군과는 달리 통합되지 못하고 서군쪽 지휘관들이 모두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러한 다이묘들 중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깃카와 히로이에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배반 또는 내통을 약속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에야스에게 적극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군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87] 다음 날인 9월 15일 동군은 배신을 약속한 서군 다이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미쓰나리는 이부키야마로 도주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시마즈 군은 동군의 중앙을 정면 돌파해 이세국으로 탈출하였다.[88] 이렇게 하여 일본 열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동군이 압승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이에야스에게 저항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등은 모두 체포되어 10월 1일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참수되었다.[89] 이외 서군에 가담했던 모든 다이묘들은 가차없이 가이에키(改易)[주 7] 또는 감봉(減封)을 당하였다. 하지만 예외로 시마즈 씨는 이에야스에게 동군을 정면 돌파해 퇴각한 것이 눈에 띄어, 사쓰마국과 오스미국의 60여만석을 그대로 인정받았다.[89] 또한 사타케 씨 등 형세를 관망하던 이들도 덴포를 당하였으며, 히데요리도 셋쓰 국, 가와치 국, 이즈미 국 등 세 개 구니 65만석으로 감봉되어 일개 다이묘로 강등되었다.[89] 대신 이에야스는 이들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동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거나 동군에 협조한 서군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들을 도자마 다이묘로 임명하고 1만석 이하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하타모토들도 다이묘 대열에 합류시켰다. 또한 같은 도쿠가와·마쓰다이라 씨의 일족으로 다이묘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와 사후 처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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