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장강 수군 손오 유송

기존 Rafe 번역글 보강(뭐 기존거 번역도 흠잡을데 없어서, 그냥 병음표기한 거 한자 다 찾은 정도...)하고 남북조 위주로 언급하는 딴 논문도 붙임





a. '위진' (손오 수군)





(Rafe de Crespigny, Some notes on ships and naval warfare 파트 중심으로 의역 - 사실 반 정도 하다가 기존 번역글 있는거 찾음 ㅎ... 적벽대전글 이미 읽었으면 밑에 유송 수군 주가글로 바로 ㄱㄱ...)





일단 모든 거에 앞서서, 고대 중국 사료로 뭐 구체적인 전술 추정하는거 좆같다! (고 Rafe가 그럼ㅎ)





- ex. 삼국지는 황개가 거느린 배를 수십 척이라고 하지만(주유전) 자치통감에서는 한 글자(수십에서 '수')가 빠져서 그냥 10척을 지휘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지는 황개를 '주유의 부장(部將) (오주전)'이라고만 하는데, 손권군의 지휘체계가 엄격히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암시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꿈보다 해몽이고 아마 그냥 역사가가 정확한 보직명* 몰라서 대충 적은 거다.



* 주 : 황개전에서는 적벽대전 이전에 단양도위(丹楊都尉), 적벽대전 이후에는 중랑장이라고 하는데 전투 당시의 보직명은 확실히 밝히지 않고, 그래서 직급에 따라서 거느렸을 법한 함대 규모를 추정해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8세기 중반 편찬된 태백음경(太白陰經)에선 여섯 종류의 군함을 열거하는데 이게 군사용어사전 같은거라 당대의 스탠다드한 싸움배 종류 묘사로 쓰인다.





- 누선(樓船, louchuan) : 대형함



- 전함(戰艦, zhanjian ; 투함鬬艦, doujian이라고도 씀) : 대형함



- 몽충(蒙衝, mengchong) : ?



- 주가(走舸, zouge) : 소형함



- 유정(遊艇, youting) : 소형함



- 해골(海鶻, haihu) : 소형함





몽충(蒙衝)은 생가죽으로 덮어서 화공과 화살 상대로 보호됐고, 쇠뇌를 쏘고 창을 찌를 수 있는 구멍을 뱃전에 뚫어뒀다고 한다. 하지만 (태백음경에서는) 몽충이 단순히 방어력만 몰빵한 게 아니라 날렵하고 가벼워서 재빨랐다고 하는데, Needham은 충衝을 '빠르게 달려드는' 뭐시기로 해석한다.





하지만 황조가 장강-한수 하구(=면구沔口)를 틀어막을 때 묘사(동습전)를 보면 강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매달고 蒙衝 두 척을 정박시켜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이때 몽충은 돌격선이 아니라 수상요새 역할이다.





따라서,





1) 3세기(삼국지)랑 8세기(태백음경) 사이에 몽충이란 함종의 역할이 척후전 위주로 변경되면서 가벼워졌다?





2) 그러면 3세기에 衝이라고 쓰는 이유는 Needham의 주장처럼 '빠르게 달려드는 뭐시기가 아니라 그냥 더 원론적으로 '적을 박살내는' 뜻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때엔 적을 박살내는 방식이 빠르게 달려드는 거였지만, 한나라 때는 느릿느릿해도 질량빨로 충각해서 박살내는 대형 전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난 3세기 몽충의 역할이 선두로 돌입해서 적 대형을 어지럽히고, 그렇게 적 수군을 배 하나하나 단위로 고립시킨 후 둘러싸서 각개격파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브루저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 적을 들이받아서 침몰시키는 건 아니고, 그냥 대열에 난입만 해서 어지럽히는.



* 주 : Needham은 몽충에서 몽蒙이 모冒에서 유래해서 가죽 덮개가 아니라 충각을 뜻한 거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원은 그럴 수도 있어도 8세기엔 덮개 얘기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Rafe도 몽이 덮개 얘기하는 거 맞단 데엔 동의하지만 애초에 몽이 충각 뜻한 적이 없었고 이미 3세기부터 덮개 뜻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투함(鬬艦)에 대해서는, 당나라 사료들은 두 단으로 올린 뱃전에 화살구멍을 뚫어둔 개방된 대선으로 묘사하는데, 헷갈리게도 이건 싸움배고 몽충은 싸움배가 아니라고 한다. Needham은 아마 육상전에 익숙한 대다수의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썼을 것이며, 몽충은 배가 직접 배와 교전하는 수전 전용이었으면 투함은 선상백병전이나 투창, 쇠뇌 사격전 플랫폼으로 쓰였을 거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삼국지에 나오는 '蒙衝鬬艦' 대목은(주유전) 당대 주력함의 두 종류(배 vs 배 특화 = 몽충, 보병 플랫폼 = 투함)를 묶어서 그냥 수군 전체에 대해 언급하는 문구일 것이다. ('몽충투함'이란 함종이 아니라 '몽충&투함'일거란 소리)





한편, 한나라 때는 누선(樓船) 또한 대형 전투함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쓰였는데, 전한 때엔 이 누선의 건조와 지휘를 관할하는 누선장군(樓船將軍)이란 직책도 있었다.* 이후 왕조들에서도 있는 직책이라, 아마 후한 때에도 언급이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폐지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나라 때는 누선을 몽충/투함과는 아예 종류부터 다른 특정 함종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지만, 후한말 이즈음에 '누선'이라고 하면 그냥 대충 갑판 여러개인 대형 전투함 뭉뚱그려서 부르는 거로 쳐도 될 것 같다.



* 역주 : Rafe가 '누선장군'의 남월, 동월 토벌 얘기하는데 이거 고조선 정복전도 뛴 누선장군 양복 얘깁니다 ㅇㅇ;





강 물살이나 바람 변하는 거 생각하면 함선들은 전부 돛+노 둘 다 기본으로 갖췄을 거고, 군함으로 설계됐어도 민간 선박이랑 생김새는 유사했을 것이다. 3세기 초 중국 함대는 아마 뱃전을 더 높게 올리고 선원을 쓸데없이 과적한(=전투원 태운) 민간 선단과 유사하게 생겼을 것이고*, 척후전에 활용할 수 있는 민간 쪽배들도 닥치고 징발해서 쪽수를 채웠을 것이다.



* 주 : 여몽의 219년 형주 공략 당시 전선을 상선으로 위장한 등에서, 둘 사이가 크게 형태적으로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상전투는 해상전투와는 다르게 양쪽 강둑 사이로 전투구역이 제한되어 있고, (해전에 비해) 양측 지휘관이 보통 적군의 배치와 움직임에 대해 소상하게 파악한 상태로 벌어진다. 또한 강변에서 작전하는 육군과 긴밀하게 연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상함대는 많은 면에서 육군처럼 행동하며, 대개 육군에게 종속되어 활동한다. 많은 함선들이 병력의 수송을 가장 우선시해서 설계되며, 수군이 수전을 벌일 확률은 상륙해서 육전을 벌일 확률과 비등하다. 이는 여몽이 유수오 만들 때 오나라 장수들이 제시한 반론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이러한 강상함대의 특징(육군 수송이 주요 임무)은 한나라 때의 병기들론 상대 함선을 박살낼 수 없었단 점에 의해 더욱 부각되었다. 화공선 빼면. 구역화되어 있고 단일 용골이 없어서 (지중해 갤리선들과는 달리) 박아도 쉽사리 침몰하질 않았다. 그리고 대포 이전에 있던 투석기 같은 기계포병은 배에 올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연사속도 같은 게 개노답이라 배 vs 배에 써먹기는 힘들었다*.



* 주 : 하지만 배에서 육지의 요새를 공격하는 데엔 쓰였다. 대표적 예시로 파양호 대전.





* 주 : 충각함에 대해선 (1) 흘수선 아래 박아서 구멍내고 침몰시키도록 특화설계된 거랑(충각?) (2) 그냥 대충 뱃머리부터 박는 거에 튼튼하게 버티도록 설계된 거랑(충돌공격 전문?) (3) 딱히 그런 설계사상 없는데 그냥 가까이 붙이다가 들이박는 거(충돌공격 가능?)랑 구분하기 모호해서 아테네 삼단노선마냥 '충각 특화함'이 있었냐는 걸 확실히 답할 수는 없고, 위진남북조 때엔 있었다는 단편적인 사료가 여럿 존재하긴 하는데 또 파양호 대전에선 서로 충각질 안하고 사격만 하니까 적어도 원말명초 때엔 충각 안쓴 거 같다.





* 역주 : 이후 원문에선 1866년 리싸 해전 전후로 일시적인 장갑함에 충각달기 붐이 일어난 유럽 얘기하는데, 솔까 이건 막 활대기뢰 나오고 그러던 아주 잠깐 과도기고, 중세 유럽도 로마 망할 때쯤이면 배 건조방식 변화로 '한방 죽창' 충각은 지중해 갤리선 전술에서도 사장되었습니다 ㅇㅇ; 몽충 같은 거도 그냥 질량으로 막 부딪치고 밀어내면서 스크럼 짠 상대 함선들 진형 어지럽혀 놓는 거였단 '충각 큰역할 안함' 해석이 더 합리적인 듯. 아래 딴 논문에서 나오는 쾌속선 스웜전술도 우월한 기동성으로 하나씩 고립시키고 패는 맥락이지 무슨 일회용 중세 어뢰정처럼 충각으로 다 가라앉힌다 이런 건 아니니까...





화공은 가능성이야 있었지만 풍향 잘 타는게 중요하고 상대 기동이 봉쇄되어 있어야 하고 기습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등 여러모로 운빨좆망겜이라 보통 쪽배나 폐급 배들을 쓰거나 그런 걸 개조해서 급조식으로 들이박는 식이었다. (모든 상황이 갑자기 잘 맞아떨어져야 있던거 가지고 후딱 화공 꼬라박는거지 캠페인 계획단계부터 화공으로 쇼부본다고 계획하는 건 병신이란 소리) 화공선의 직접 충돌 외엔 불화살 정도밖에 딱히 불로 공격할 방법이 없었는데, 불화살은 방어측이 진화하기 쉬웠다*. 중국에는 그리스의 불이 없었다*.



* 역주 : 어차피 화약 아니면 불화살에 불도 잘 안 붙고, 쎄게 날리면 날아가면서 꺼져서 장거리는 못 날리죠 ㅇㅇ;



* 역주 : 주석으로 화정, 맹화유 좀 얘기하는데 촉버테크 생각나네요 ㅇㅇ;





한편, 이 시대의 수군에게 가장 위협은 적군이 아니라 날씨였다. 장강과 지류, 호수들에선 거의 바다나 다름없는 온갖 환경들이 튀어나올 수 있었고, 싸움배는 그냥 배보다 전투용 갑판을 더 많이 얹어놔서 탑-헤비했고 불안정했다. 동습전에서 동습도 오루선(五樓船)*이 폭풍에 전복되는 바람에 죽었다. 손권도 폭풍 만나서 좆될뻔한 적 있고, 222년 조비의 남정 때 여범 휘하 배들도 장강에서 폭풍 만나서 좆됐다.



* 주 : '누선 5척' 아니면 '갑판 5개짜리 배'로 해석 가능한데 Rafe는 갑판 5개짜리 배로 해석했다.





일반적으로 남방인들이 북방인에 비해 조함술이 더 뛰어난, 훌륭한 선원들이었다. 조조가 장강으로 침공해오기 전에 호수에서 함대를 조련하는 장면들을 엿볼 수 있지만, 이런 인공적인 환경에서 훈련 좀 하는거랑 오나라 수군이 장강 돌아다니면서 쌓는 실전짬밥이랑 비빌 수는 없었다. 장강 끼고 살면 어차피 장거리 이동이나 민간 수송도 다 강으로 하니까 뱃사람이 많을 수밖에.





이런 면에서 볼 때 적벽대전의 의미는 커지는데, 208년에 유표한테서 인수한 형주 수군은 똑같이 장강을 돌아다니는 애들이어서 손권네 애들이랑 수준이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벽대전과 강릉 전투로 조조는 형주 수군을 날려먹는다. 당시 조조는 '배는 다시 만들면 되는데스' 하면서 수군 상실에 큰 걱정을 느끼지 않았을 수 있지만, 이건 손권과 유비에게 장강을 넘겨준 셈이었다.









b. '남북조' (유송 수군)





(Chittick, The Transformation of Naval Warfare in Early Medieval China)





남중국의 전쟁사는 북중국과는 달리 수전이 매우 중요했지만, 중국사에서 역사가들이 흥미를 가지고 병법가들이 떠드는 건 주로 건조한 북방에서 일어나는 육상전들이고 여기서 수군은 철저히 보조적, 보통 병참만 담당하는 역할에 그친다. 하지만 2-6세기 남중국은 인구&경제 급성장을 겪었고, 한나라가 망한 후 장강 남쪽에서는 여러 강력한 정권들이 차례로 흥하며 수전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담론은 대개 수전을 다뤄도 대규모 전역만 다루는데, 208년 조조의 적벽대전, 279년 진의 오 정복, 587년 수의 남진 정복 등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404년 환현과 410년 노순의 반란 때 건강(建康 ; 난징) 공격 정도가 더 논해진다. 이들은 다 '장강 상류에서 누선으로 대함대를 편성~ 남조 수도를 향해 강 타고 남하'의 패턴을 따르고, 이를 근거로 David Graff 등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수군전술을 '더 큰 배에다가 더 발전된 무기를 잔뜩 쑤셔넣는 놈이 이겼던 경쟁'으로 설명한다.





뭐 틀린 말까진 아니지만, 고중세 중국의 수전 전술은 누선이 다가 아니었다. 적벽대전이나 환현, 노순의 패배에 연관되는 공통적 묘사는 '거추장스러운 대선들을 잔뜩 만들어서 뭉쳐두니까' 소형함들의 화공이나 아웃복싱에 취약했단 것이다. Ralph Sawyer는 대형함들이 궁수를 더 많이 싣기에 사격전에선 유리했지만, 바람이 받쳐주지 않으면 기동성이 극도로 제약되며, 높은 뱃전으로 쉽사리 조함하지도 못했으며, 화공과 충돌공격에 더 취약했다고 한다.





동시대 중국인들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기에, 소형함들이 점차 수전에서 주역을 차지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舸, 접艓, 정艇 등의 한자는 후한대에 최초로 등장하며*, 사서에서는 후한 이후에 편찬된 경우에만 등장한다.



* 가, 정 한자의 최초 등장 : 후한 중기에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





보다 스페시픽하게 '특정 싸움배'를 지칭하는 가(舸), 접(艓), 정(艇), 몽충(蒙衝), 책맹(舴艋), 편(艑), 모(艒)가 일반적인 주(舟), 선(船)에 대비해서 나타나는 비율을 조사하면 한나라 사서(사기, 한서, 후한서) = 0%, 3-4세기 사서(삼국지 등) = 3%지만 남조에서 편찬한 사서들에선 15%에 달하며, 특히 이중에서 가(舸)가 '특화된 한자' 등장 건수 중 80%를 차지한다.



* 함(艦) 역시 한나라 이후에야 등장하고 어느 정도 특화된 한자지만 민간 상선과 전투함 양측을 지칭하기에 통계의 양쪽에서 생략





또한 한나라 사서에 나오는 수전은 전부 '누선'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 3-4세기에는 대형함과 소형함 언급빈도가 비슷하고, 5-6세기에는 소형함 언급빈도가 대형함보다 도리어 증가함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많이 보이는 가(舸)는 경가(輕舸), 비가(飛舸), 주가(走舸) 등의 2글자 단어에 자주 쓰이며, 앞에 붙는 글자는 모두 '가볍고 빠른' 특성을 강조한다. '주가'가 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8세기 태백음경(太白陰經)에서 최초로 찾아볼 수 있다;







[주가(走舸)는 싸움배의 일종이다. 뱃전 위로 2열의 싸움갑판(rampart)이 있다. 노잡이가 많고 전투원은 적은데, 전부 가장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이들 중 가려 뽑는다. 날으는 듯이 전진하고 후퇴하며, 기병도 그 속도에 비길 수 없다. 위험에 처한 곳의 구난에 용이하다.





유정(遊艇)은 정찰용이다. 싸움갑판이 없다. 좌우 뱃전 위로 노걸이가 4척마다 하나씩 존재한다. 모으고, 전진하고, 멈추고, 돌아오고, 대형을 바꾸는 속도가 바람과 같다. 이들은 정찰용이지 전투용이 아니다.]







송서에서는 '육전은 늘 수천 명 한복판에 있지만, 수전에서는 '가(舸)' 한 척에 타고 있다; '가'들은 각자 전진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자칫하면 고작 서른 명과 함께 고립될 수 있다'라고 서술한다. 이에 의하면 한 '가'에는 대략 30인이 탑승했으며, 이는 후경이 배 한 척을 타고 도망칠 때 '수십의 심복'을 거느린 것과 잘 부합한다. '가', '정' 등의 소형함은 '경기병'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수백 척의 소형함이 유군(遊軍) 또는 유알(遊遏)으로 불리는 편제로 무리지어 정찰, 순찰을 담당했다. '가'는 보통 보조함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숫자와 기동성의 우위를 활용해 대형함과의 교전에서도 상당히 활약할 여지가 있었다.





특히 태백음경에서 주가를 기병과 비교한 대목에서 '경기병' 비유가 당대인 마인드에도 상당히 잘 들어맞음을 볼 수 있는데, 진서는 404년 환현이 '더 우세한 군대를 거느렸음에도' 진 이유를 '패배를 두려워해서 늘 선(船) 옆에 가(舸)를 띄웠기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가'는 원래 '선' 근처에 얼쩡거리는 역할이 아닌 함종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유군, 유알 등도 본대와 수십 리를 떨어져 선봉으로 작전하는 경우가 잦았다.





한편 몽충(蒙衝)의 경우, Needham은 일종의 '중기병' 역할을 담당한 '장갑을 씌운 가(舸)'로 보지만, De Crespigny는 Generals of the South에서 이를 반박*하였다.



* 역주 : 엄밀히 말하면 Rafe의 반박은 3세기 몽충은 투함 비스무리였을 거다란 거고, 8세기엔 몽충이 쾌속선으로 발전한 거 자체는 태백음경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기에 거기까지 반박하진 않는다. 그냥 양차대전 '구축함'이랑 현대전 '구축함'이랑 롤이 다르다 그정도 소리지 전면적으로 '몽충=뚜껑달린 쾌속선'을 반박하는 건 아님





서른 정도 태웠고 뱃전도 낮았을 '가'의 전면전 전투력은 낮지만, 일단은 사격전 백병전 다 가능하긴 했다. 410년 노순의 반란 도중 유유군의 '가'가 노순군의 '함(艦 ; 대개 단층갑판, 민간선 개조)'을 붙들고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인 일화나, 466년 유송 내전(유자훈의 난)에서 50척의 대함(大艦)과 200척의 가(舸)로 구성된 반란군의 전열이 토벌군의 비가(飛舸) 무리에게 돌파당한 후 각개격파된 일화가 송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 소형함의 중요성은 466년 유송 내전에서 특히 부각되는데, 송명제 유욱 편을 들어 건강군을 지휘한 심유지(沈攸之)는 '배를 잘 다뤘다(繕治船舸)'고 기록되어 있고, 수하의 장흥세, 오희 등은 수전 전문가로 묘사된다. 특히 장강 하류에 주둔하던 심유지군은 장흥세(張興世)의 제안으로 466년 7-8월에 200척의 '가'와 7천 병력으로 장강 작미(鵲尾)에 주둔한 유호(劉胡)군을 몰래 지나쳐 상류의 요충지를 점거하고 '수상전보다 육상전에 더 익숙한' 유호의 수군을 앞뒤로 에워싸 대승을 거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1) 재빠른 쾌속선은 물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쟁에 있어 정찰과 연락을 위해 필수적이었을 뿐 아니라 (2) 수백 척 규모로 무리지어 다니며 장강의 이미 알려진 요충지들을 재빠르게 점령하고 틀어막는 기동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고, 더 우세한 대형함들의 공격도 상당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 사서들은 기전체로 작성해서 전쟁사도 가장 탑급을 찍은 주요 사령관들 위주로만 엿볼 수 있고, 그래서 이런 중간관리자급인 '수전 전문가'들이 행하는 전술기동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기 힘든데, 장흥세는 열전이 있어서 466년 내전에서 유송 수군이 취한 기동을 상당히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5세기 장강의 수전에선 대형함은 주로 병력 수송역할을 담당했으나 가장 치열한 함대함 교전은 소형함이 주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의 민간선 선원 이상으로 훈련된 수군 인력을 필요로 했는데, 6세기경부터 시작된 단오맞이 용선경주 문화도 수군(水軍) 등의 용어가 쓰인 걸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러한 장강 수군의 전술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3. 개인적 의견





Rafe가 몽충에 대해서 말하는게 3세기 컨텍스트에선 더 맞는 걸로 보이고, 몽충 또한 전술적인 역할(적 전열에 선두로 난입)만 유지하면서 전반적인 쾌속선화 트렌드를 따라간 거 같음. 그거 외엔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일반론적 얘기라 다 맞는 분석이고...





특히 몽충 관해선 3세기에는 투함이랑 체급차이가 극히 적었을 거 같은게, 동습전에서 동습이랑 능통이 각자 백 명씩 이끌고 몽충 2척에 꼬라박을 때 큰 가선(大舸船)에 타는데, 이 병력을 '갑옷을 두 벌씩 껴입은(被著两鎧) 일백 결사대(死士)'라고 특별히 언급해 주는 거 보면 '큰' 가선 탑승인원도 물량빨로 몽충 탑승인원을 밀어붙인 게 아니라, 각 몽충 탑승인원은 '일백 사사'를 상회했던 것으로 보임





위에선 동습이랑 능통이 큰 가선 하나를 나눠썼는지 애매한데, 능통전에서는 같은 장면에서 '평소 후대하던 병사 수십'과 '한 척의 선(一船)'을 타고 황조의 장수 장석을 참수하는데, 이거랑 위의 동습전이랑 같은 전투고 얘네 수십=능통의 사사로 추정되니까 동습이랑 능통이 각자 이끌었다던 부대들은 각자 배도 따로 쓴 걸로 추정됨. 역시 '선(船) 탑승인원 < 몽충 탑승인원'의 사례





그리고 '가'에 관해서는 소형함 vs 대형함이 언제나 그랬듯이 일장일단 당연히 존재하는데, 일단 소형함 대충 뽑아서 수십~수백 막 굴려먹는 게 대형함 각잡고 건조하는 것보다 효율상 낫고, 소형함의 최대 약점인 '장강에 태풍불면 꼬로록한다' 역시 켜켜이 싸움갑판 올린 누선에서는 더 불안정성이 심하면 심했지 딱히 체급 크다고 안정적인 게 아니라서 갈수록 소형함 위주로 수군이 발달한 거 같음. 이건 대형함 전체의 문제는 아니고 '누선' 문제라 건함기술이 발달하면 큰 배의 장점이 더 부각되지만. 그리고 수전이 이런 양상이니까 장강 짬먹은 애들 이겨먹기가 힘들어져서 장강 이남 남조 구도가 나름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된 거에도 기여했을 거라고 생각되고





다만 아래의 소형 쾌속선 위주 발달을 주장한 Chittick도 Dreyer가 파양호 대전을 다룬 걸 출처로 달면서 파양호 대전 때엔 대형함의 역할이 더 결정적이었단 데에는 동의해서, 결국 케바케긴 함... 다만 어떻게 보면 진우량 누선들도 개같이 망했으니까 '소형함 전술적으로 잘 써먹는 쪽이 더 수전에 능숙함' 이 구도에선 딱히 벗어나지 않는 거 같기도 하고...





결론 : 장강에선 청년학파가 더 일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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